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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역사 관련/한국의 역사이야기21

불세출의 신궁 - 보우 마스터 태조 이성계의 일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는 아직까지도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야사는 물론이고 정사를 봐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일화가 많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왜 한국사 최강의 보우 마스터라 일컬어지는지 일화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화살 1발로 5마리의 까마귀를 잡다 이성계가 젊었을 때 자신의 아버지, 이자춘의 첩인 김씨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 이성계에게 활로 쏴서 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화살 1 발을 쏴서 까마귀 5마리를 동시에 맞혔습니다. 이것을 본 김씨가 태조에게 절대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괴력을 가진 이성계 이성계가 쓰는 활도 특별했는데 아버지인 이자춘이 아들이 쓰는 활을 보고 "인간이 쓸 물건이 아니다"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입을 노리고 쏜 화.. 2023. 7. 11.
동서양 문명 발전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문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정치, 경제, 철학, 과학 등의 많은 부분에서 그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동서양의 차이를 살펴보면 또 다른것이 보이지 않을까 해서 정리를 좀 해봤다. 정치 서양 서양은 다양한 정치 체제를 경험했다.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들이 집회를 통해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로마에서는 공화주의 체제가 발전했으며, 근대 서양에서는 국가 체제로서의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등장하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투표를 통해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다양한 정치 당과 선거 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주주의 이외에도 근대적인 군사독재, 극우나 극좌의 이념을 갖는 체제들도 서양에서 등장했다. 동양 동양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주로 존재.. 2023. 6. 4.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그 날 1970년 11월 13일 '그날'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국립의료원을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저녁 10시쯤 명을 달리했다. "기업주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 15,16세의 어린아이들이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혹사당하고 있으니 당국은 이런 사태를 시정해달라" 전태일은 호소하면서 미리 준비해뒀던 휘발유로 [근로 기준법해설] 이란 책을 태우려다 제지를 받고 자기 몸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는 분신하기 전,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근로 기준법을 지켜주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 열사의 활동 삼 년 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평화시장에서 재단 일을 배워오다 피복 제조 근로자들의 친목단체인 삼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 2022. 11. 12.
조선시대 3대 도적 장길산 ?~? 조선 후기 숙종 때의 인물이다. 광대 출신으로 용맹하고 날쌔서 도당을 모아 도적이 된다. 홍길동, 임꺽정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불린다. 홍길동, 임꺽정에 비해 기록이 현저히 적다. 추안급국안에 적힌 바로는, 장길산은 함경북도 서수라나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서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곳이고, 벽동군은 중국 국경과 마주한 곳이다. 서류 이영창과 승려 운부가 장길산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했다고 나온다. 조선 3대 도적 중에 장길산만 잡힌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끝내 잡히지 않고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장길산 무리의 규모는 말을 탄 병사 5천 명과 보병 1천여 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그때부터 영웅의 이미지.. 2022. 10. 28.
백제의 장군이 중국 북망산에 묻힌 이유 - 백제장군 흑치상지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刺史, 지방 관리)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촌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 존산(任存山, 충남 예산)에 웅거 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흑치상지 [黑齒常之] (원문과 함께 읽는.. 2022. 9. 17.
진대법을 만든 고구려 재상 - 을파소 191년에 고구려 재상의 자리에 오른 을파소는 진대법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국천왕 시절 권력을 지닌 자들이 나쁜짓을 많이 하자, 고국천왕은 그들을 내쫓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찾는다. 대신들의 추천을 받은 안류는 고국천왕에게 가 아뢰옵길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정사에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琉璃王)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이 써 주지 않으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당시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추천하였는데, 안류와는 어떤 인연인지 알려져있지 않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우태로 삼으려.. 2022. 9. 8.
고려의 최고 무신 척준경 척준경은 황해도 곡산에서 가난한 향리인 척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학문보다 무술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당시 고려에는 무과가 없어 동네의 무뢰배들과 어울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 계림공 왕희의 인연으로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에게 관리직은 어울리지 않았고 그러던 중 제1차 여진 정벌이 일어나게 된다. 두각을 나타내다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아군이 포로로 잡히자 척준경은 총사령관이던 임간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청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상황이 혼란하여 그런지 임간은 척준경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척준경은 홀로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구출한다. 그러자 1백 기가 추격해왔고 적장 두 명을 죽이며 아.. 2021. 9. 7.
고구려 모본왕은 과연 폭군일까? 부여 태후는 왕을 죽였나? 대무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민중왕과 다음 왕인 모본왕의 삼국사기 기록은 맞을까? 혹시 후대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은 첫째 부인의 계략에 의해서 자결을 하였다고 나와있다. 여기에서부터 살펴보자. 호동의 어머니 호동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이고 갈사왕의 손녀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갈사왕은 누구인지 살펴보자. 대무신왕 5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가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의 .. 2021. 3. 18.
초기 고구려와 옥저, 그리고 동예 - 독특한 풍습과 문화 고구려의 동맹과 서옥제 초기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그 지역은 평지가 거의 없고 산만 가득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지냈다. 자연스럽게 말 타는 솜씨와 활 솜씨가 늘었을 것이다. 그런 실력으로 동쪽의 옥저를 털었다. 불쌍한 옥저를 해마다 털어먹으면서 지냈던 것이다.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제천행사인 '동맹'을 지내며, 옥저의 농사가 잘 되길 바라기도 하였다. 옥저의 식량으로 신나게 놀고 먹었던 것이다. (지금의 일진과 빵셔틀도 아니고......) 부여에서 내려 온 주몽 때문인지 고구려의 풍속은 부여와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서옥제'라 한다. 상남자인 고구려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달려가 딸을 달라고 .. 2021.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