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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역사 관련/한국의 역사이야기

백제의 장군이 중국 북망산에 묻힌 이유 - 백제장군 흑치상지

by 은색꿀벌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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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刺史, 지방 관리)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촌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 존산(任存山, 충남 예산)에 웅거 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흑치상지 [黑齒常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흑치상지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하자 임존산에서 농성을 하며 3만여 명의 병력을 모은다. 그렇게 200여 개의 성을 탈환하고, 백제의 부흥을 바라는 복신과 도침을 만나 합류한다. 당시 왜 나라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고 왜에서 병력을 지원받는다. 그렇게 백마강에서 나당연합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펼쳤는데 백제군은 완패를 하게 된다. 

 

더 이상 할 수 있었던 것이 없었던 흑치상지는 당나라군의 유인궤에게 항복하고 당나라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넘어갔던 왕자 부여융의 설득이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렇게 흑치상지는 백제를 떠나 당나라로 가게 된다. 후에 사람들은 당나라로 간 흑치상지를 배신자로 여겼다고 하지만, 아마도 당나라에서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당나라의 대장군

 

당나라로 간 흑치상지는 꾸준한 전공을 올린다. 돌궐과의 전투에서는  조하도경략부사의 직위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좌무위장군의 직을 거쳐 좌 응양 위대 장군 연연 도부대총관에 임명된다. 항상 적은 군사를 이끌고 많은 적에게 승리를 하였다고 하는데, 백제에서 같이 넘어간 병사들과 함께여서 가능했다는 설이 있다. 

 

그 후에도 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 경략 대사라는 벼슬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측천무후 때에 여러 사람들의 무고로 인하여 반란에 연루되어 죽는다. 

 

 

 북망산에 묻히다

 

낙양의 북망산은 당시에 한 자리 하던 사람들만 묘를 쓸 수 있었는데, 죄인의 신분으로 죽은 흑치상지는 묻히지 못하였다. 하지만 흑치상지가 죽은 지 10년 후에 아들 흑치준의 노력으로 억울함을 풀게 된다. 그리하여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 검 교좌 우림위 상주국 연국공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백제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대장군으로 북망산에 묻히게 되었다.

 

상지는 아랫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그가 타는 말이 병졸에게 채찍을 맞는 일이 생기자, 어떤 자가 병졸을 처벌하라고 하였다. 상지가 대답했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을 매질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흑치상지 [黑齒常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아랫사람들을 유독 아꼈던 흑치상지가 의미없는 곳에서 죽게 되느니 당나라에서 대업을 이어가자며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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