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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역사 관련/한국의 역사이야기

초기 고구려와 옥저, 그리고 동예 - 독특한 풍습과 문화

by 은색꿀벌 2021.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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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동맹과 서옥제

초기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그 지역은 평지가 거의 없고 산만 가득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지냈다.  자연스럽게 말 타는 솜씨와 활 솜씨가 늘었을 것이다. 그런 실력으로 동쪽의 옥저를 털었다. 불쌍한 옥저를 해마다 털어먹으면서 지냈던 것이다.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제천행사인 '동맹'을 지내며, 옥저의 농사가 잘 되길 바라기도 하였다. 옥저의 식량으로 신나게 놀고 먹었던 것이다. (지금의 일진과 빵셔틀도 아니고......)

 

 

부여에서 내려 온 주몽 때문인지 고구려의 풍속은 부여와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서옥제'라 한다. 상남자인 고구려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달려가 딸을 달라고 청하였다. 딸의 부모들은 남자가 마음에 들면 자신들의 집 옆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어주고 거기에서 살게 한다. 그리고 예비 사위를 노예처럼 부려먹는다. 시간이 지나 딸이 크면 합방을 시키고, 아이를 낳으면 독립을 시킨다. 

 

 

 옥저의 민며느리제와 골장제

불쌍한 옥저는 자리를 잘못잡아 고구려에게 항상 털리기만 한다. 고구려 때문에 발전하기도 힘들고 그저 소금을 만들고, 생선을 잡아 고구려에게 뜯기기만 했다. (현대판 섬노예도 아니고ㅠㅠ) 옥저는 고구려에게 항상 빼앗기기 때문에 제천행사따윈 지내지도 않았다. 

 

옥저는 결혼 제도도 고구려와 정반대였다. 신랑이 신부 집에 돈을 주고 신부를 데려온다. 보통 여자 나이 10세가 되면 약혼했다고 한다. 그렇게 데려온 예비신부는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합방을 시켜 아이를 갖게 하였다. 이 제도는 '민며느리제'라 한다.

 

옥저는 독특한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골장제'라 부른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죽게되면 땅에 얕게 묻은 뒤 뼈만 남게 썩게 한다. 그 뼈를 나무상자 안에 모았는데, 한 사람의 것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가족들의 뼈도 같이 넣었다. 즉, 나무상자는 가족 공동묘라 생각하면 된다. 그 나무상자에 쌀이 담긴 토기를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굶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만큼 옥저 사람들은 가족을 소중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동예의 무천과 책화

동예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와 같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예도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각기의 부족들로 나뉘어 살았다. 지금은 강원도 지역에서 살던 그들은 과하마와 단궁, 반어피가 특산품이었다. '과하마'는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말이라는 뜻인데,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유용하게 쓰여 많이 길렀다. 그리고 짧은 화살을 쓰는 단궁을 만들고, 물범을 잡아 가죽을 얻기도 하였다. 

 

동예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옥저 덕분에 고구려에게 조금 덜 뜯겼다. 그래서 동예에서는 제천행사도 열렸는데, '무천'이라 불렸고 10월에 열렸다. 

 

동예 사람들은 선 긋기를 좋아했나보다.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면 소나 말로 배상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책화'라고 한다. 하지만 결혼만큼은 자신의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 사람과 하도록 하였다. 

 

 

#마치며

옥저와 동예는 부족이나 마을 간의 실력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사람들이 싸움을 싫어했을지도 모르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나와서 지역을 통합하여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면, 아니면 삼한 지역으로 뻗어나갔다면 조금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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