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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역사 관련/한국의 역사이야기

고구려 모본왕은 과연 폭군일까? 부여 태후는 왕을 죽였나?

by 은색꿀벌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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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왕은 누가 죽였나?

 

대무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민중왕과 다음 왕인 모본왕의 삼국사기 기록은 맞을까? 혹시 후대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은 첫째 부인의 계략에 의해서 자결을 하였다고 나와있다. 여기에서부터 살펴보자.

 

 

호동의 어머니

호동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이고 갈사왕의 손녀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갈사왕은 누구인지 살펴보자. 

대무신왕 5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가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아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내용이다. 갈사왕은 대무신왕에게 죽임을 당한(실제 죽인 건 괴유였지만) 대소의 막내 동생이다. 그런데 집안의 원수인 대무신왕에게 자신의 손녀를 시집보내다니 의문이 든다. 혹시 갈사왕이 겉으로는 대무신왕에게 친한 척을 하고 후일을 도모하려 손녀를 보낸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호동을 낳고 호동에게 공적을 세우게 하여 고구려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략은 들통나게 되고 호동은 처형되거나 자결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부여에서 온 사람들은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민중왕과 모본왕

민중왕 시절에 1만여 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당시의 고구려는 자연재해 때문에 굶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당시 고구려는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본왕은 삼국사기에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모본왕은 사실 폭군이 아니었을 거라 추측한다. 폭군이 과연 백성들을 굶주림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나름대로 백성을 아끼고 정사를 돌보려 하였으나 힘이 약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뜬금없는 두로라는 인물이 나온다. 모본왕을 시해한 인물인데, 어떤 사람이 두로에게 모본왕을 죽이라고 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떤 사람은 누구이며 두로는 왜 왕을 죽였을까 생각해보자. 

 

 

태조대왕의 어머니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다. 즉 유리왕의 손자이며 대무신왕의 조카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부여 사람이라는 것이다. 태조대왕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여서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그런데 태후는 실권을 잡자마자 엄청난 정복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태조대왕 16년에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오는데, 그를 우태로 삼는다는 내용도 나온다. 태조대왕 25년에는 부여에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는 내용도 나온다. 부여 사람인 태후는 고구려의 실권을 잡고 부여와 친하게 지낸 듯 보인다. 그리고 태후는 부여에 죽어서 고향땅인 부여에 묻히기를 원했고 태조대왕은 부여까지 가서 태후 묘에 제사를 지낸다. 이 점으로 보아 태후의 집단에서 두로에게 모본왕을 죽이라 명하였고, 자신의 아들인 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마치며

고구려 초기의 내용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남겨진 기록들을 다 믿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나름대로 추측도 해보고 상상해보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재밌기도 하다. 위 내용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며 개인적인 추측과 상상에 의해 쓰인 글이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는, 그저 한국 고대사를 좋아하는 사람의 추측이라 여겨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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