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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리뷰

KBS 스페셜 도자기5부. 도전의 세기-커피의 시대와 도자기 패권 경쟁

by 은색꿀벌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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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도자기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피렌체.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원조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은 어느날 이집트의 술탄에게 중국 자기 몇점을 선물 받게 된다.

중국 자기를 수백점 구매하게 난 뒤 자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575년 자기 생산을 시작했지만 고령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1200도 이상의 가마를 만들 기술이 없어서 실패한다.

 

이슬람 왕들은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 지역을 통치 하였는데, 그때 도기 제작기술을 남기게 된다.

아직까지 스페인 남부지방에는 흰벽에 도기를 장식하는 문화가 남아있다.

이슬람이 전해준 도기 기술은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네덜란드의 델프트지역에 1654년에 큰 화재가 일어나게 되고 많은 공장들이 불타 없어지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델프트 지역에 도기 공장을 세운다.

유럽 도기 생산의 중심지가 된 델프트는 청화자기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 비싼 중국자기를 사용하기 힘든 사람들의 대용품으로 큰 성공을 이루게 된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중국 자기가 10배 이상 비쌌다.

 

차와 커피의 유행

후추가 흔해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치품을 찾는다.

중국의 차와 아프리카의 커피가 새로운 사치품으로 등장한다.

 

그러던 중 17세기 중국은 만주족이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고 황실의 주인이 바뀐다.

반란군에 대비해 바다를 봉쇄했고 1673년 징더젠에 반란군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자기의 생산이 중단된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자기를 구할 수 없어 15년동안 재고품으로 버티면서 새로운 자기 생산지를 찾아나서게 된다.

그렇게 일본 쿠슈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조선 도공 이삼평

일본에선 1500년대에 다도가 유행했다. 

조선의 그릇을 최고의 다완으로 쳤다.

다완과 자신의 성을 바꾼 영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명하면서, 도자기 기술자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의 역사가 바뀌게 된다.

 

16세기 중국을 제외하고 조선만이 중국에 비견될 만한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철화백자가 유명했고 상감장식기법은 세계에서 유일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 천여명이 끌려가고 조선은 이후 병자호란까지 겪으면서 술잔조차 만들 여력이 없었다.

 

조선의 도공을 데려온 일본은 쿠슈지방에 가마를 열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온 도공인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고령토를 발견하고 최초로 백자를 생산했다.

20년간 재료를 찾다가 쿠슈지역 아리타에서 찾은것이다.

아리타의 기술 진전은 빨랐다.

30년만에 일본은 유럽의 주문을 받을만큼 성장하였다.

 

가키에몬

흰바탕에 붉은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가키에몬 도자기는 유럽에 크게 유행을 했다.

200년 전 명나라때 이미 채색자기를 만들었는데 일본으로 건너온 중국 기술자가 기술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채색자기가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유럽에서 5~8배까지 팔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의 기술로 자기를 만든 일본은 중국의 공백을 틈타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17세기 중엽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이마리자기를 날랐다.

백여년간 370만점의 이마리 자기는 유럽시장을 파고 들었다.

 

17세기 말 다시 중국이 자기 생산을 시작 했으나 이마리 자기, 델프트 자기등 경쟁자가 있었다.

심지어 중국 자기가 일본의 자기를 모방하기도 했으니 이를 '차이니즈 이마리' 라고 불렀다.

 

베니스에 세계최초로 생긴 플로리안 카페에는 여러 귀족이나 지식인들이 모였다.

이들에겐 아프리카의 커피, 아시아의 도자기, 아메리카의 담배가 최고의 호사품이었다.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춰 중국과 일본 그리고 델프트까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지금의 커피잔 셋트가 나오게되었다.

 

아마 임진왜란이 아니었으면 일본이 아닌 한국의 자기가 17세기부터 지금까지 유럽에서 사랑받고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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